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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 귀족들의 교리

Tags 세계역사기타 학파

01/15/2019Ludwig von Mises

[Translated by Sooyoun Hwang (황수연) former professor of public choice at Kyungsung University, Busan, Korea]

[≪전능한 정부(Omnipotent Government)≫[1] (1944)]

마르크스 철학의 구조를 형성하는 데 소용되는 한없이 많은 틀린 진술들과 사실의 오류들 가운데서 특히 반대할 만한 두 가지가 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대중들의 궁핍화의 증가를 야기한다고 단언하고, 편협한 마음을 가지고 있고, 부패하며, 이기적인 부르주아 계급보다 프롤레타리아들이 지적으로 그리고 도덕적으로 더 우월하다고 경솔하게 주장한다. 이런 우화들의 기각에 시간을 낭비할 가치가 없다.

과두 정부로의 복귀의 주창자들은 사정을 아주 다른 시각에서 본다. 자본주의가 대중들에게 풍요의 뿔(horn of plenty)을 쏟아 부었지만, 자기들이 나날이 더 부유해지는 이유를 대중들이 모른다는 점이 사실이라고, 그들은 말한다. 프롤레타리아들은 기술 혁신의 속도를 방해하거나 늦추기 위해 자기들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다―그들은 심지어 새로 발명된 기계들도 파괴했다. 오늘날에도 그들의 노동조합들은 생산 방법들의 모든 개선을 여전히 반대한다. 기업가들과 자본가들은 주저하고 꺼리는 대중들을 그들의 삶을 더 안락하게 하는 생산 체제 쪽으로 밀고 나아가야만 했다.

방해받지 않는 시장 사회 안에서는, 소득의 불평등이 감소하는 경향이 지배한다고, 이러한 귀족 정치 옹호자들은 계속해서 말한다. 평균적인 시민이 더 부유해지는 반면에, 성공적인 기업가들은 자기들을 평균 수준 훨씬 위로 올리는 부를 좀체 얻지 못한다. 고소득의 단지 작은 집단만이 있고, 이 집단의 총 소비는 너무 사소해서 시장에서 어떠한 역할도 할 수 없다. 중상(中上) 계급의 구성원들은 대중들보다 더 높은 생활수준을 누리지만 그들의 수요도 역시 시장에서 중요하지 않다. 그들은 자기들의 동료 시민들의 대다수보다 더욱 안락하게 살지만 그들은 상당히 다른 양식의 삶을 누릴 여유가 있을 만큼 충분히 부유하지는 않다. 그들의 옷은 하위 계층들의 그것보다 더 비싸지만 그것은 똑같은 본의 것이고 똑같은 유행에 맞추어진다. 그들의 욕실과 그들의 자동차는 더 우아하지만 그것들이 제공하는 서비스는 실질적으로 똑같다. 수준에서 옛날의 차이는 [이제] 대개 단지 장식의 문제일 뿐인 차이로 축소되었다. 현대 기업가나 경영진의 사적 생활이 자기 고용인들의 그것과 차이가 나는 것은, 수세기 전, 봉건 영주의 생활이 자기 농노들의 그것과 차이가 나는 것보다 훨씬 덜하다.

대중들이 국가의 정신 활동과 정치 활동에서 더욱 능동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이 친(親)귀족 정치적 비판자들의 눈에는, 이런 평등화로의 추세와 대중 수준의 상승의 개탄할 결과이다. 그들은 예술적 표준과 문학적 표준을 정할 뿐만 아니라, 그들은 또한 정치에서도 주권을 갖는다. 그들은 지금 공동체 문제들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에 충분한 안락과 여가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너무 편협한 마음을 가지고 있어서 건전한 정책들에서 의미를 파악할 수 없다. 그들은 모든 경제 문제들을 생산 과정에서 자기들 자신의 위치의 관점에서 판단한다. 그들에게는 기업가들과 자본가들은, 참으로 대부분의 경영진들은, 그 서비스들이 “읽고 쓸 수 있는 누구든지(anyone able to read and write)”에 의해 쉽게 제공될 수 있을, 그저 한가한 사람들일 뿐이다.1 대중들은 시기와 적의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은 그 잘못이라면 그들에게 너무나 잘 봉사했다는 것인 자본가들과 기업가들의 것을 빼앗고 싶어 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옹호하고 있는 조치들의 더 먼 결과들을 생각하는 데 절대적으로 부적합하다.

따라서 그들은 자기들의 번영이 생기는 원천들을 파괴하는 데 열중하고 있다. 민주 정치들의 정책은 자멸적이다. 난폭한 폭도들은 사회의 이익과 자기들 자신의 최상의 이익에 반하는 법령들을 요구한다. 그들은 의회에 부패한 선동가들, 모험가들, 그리고 특허 의약과 엉터리 요법을 칭찬하는 돌팔이 의사들을 선출한다. 민주주의는 이성, 건전한 정책들, 그리고 문명에 거스르는 국내 야만인들의 동란을 초래했다. 많은 유럽 국가들에서 대중들은 독재자들을 확고하게 자리 잡게 했다. 그들은 아주 곧 미국에서도 성공할지 모른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대(大)실험은 스스로 청산되게 되었다. 그것은 모든 독재 정치들 가운데서 최악의 독재 정치를 초래했다.

엘리트를 위해서가 아니라 문명의 구원을 위해서, 그리고 대중들을 위해서, 급진적인 개혁이 필요하다. 프롤레타리아들의 소득은 삭감되어야 하고 그들의 일은 더 어렵고 더 지루하게 되어야 한다고, 귀족 정치 혁명(aristocratic revolution)의 옹호자들은 말한다. 노동자는 자기의 매일의 작업이 완료된 후에 아주 지쳐서 그가 위험한 사고와 활동을 위한 여가를 찾을 수 없게 되어야 한다. 그에게서 선거권은 박탈되어야 한다. 모든 정치적 권력은 상층 계급들에 귀속되어야 한다. 그러면 대중은 무해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농노가 될 것이지만, 그 자체로 행복하고, 고마워하며, 복종하게 될 것이다. 대중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엄격하게 통제되게 해 놓는 것이다. 만약 자유롭게 되면, 그들은 악당들의 독재적 열망의 쉬운 먹잇감이 될 것이다. 늦지 않게 최상의 사람들의, 엘리트의, 귀족의 과두적인 온정적 지배를 확립하여 그들을 구하라.

이것들은 많은 우리의 동시대인들이 버크(Burke), 도스토옙스키(Dostoevsky), 니체(Nietzsche), 파레토(Pareto), 그리고 미첼스(Michels)에게서, 그리고 지난 수십 년간의 역사적 경험에서, 얻은 견해들이다. 당신은 쓰레기 같은 인간들의 독재와 현명한 왕들과 귀족들의 자비로운 통치 사이에서 선택해야 한다고, 그들은 말한다. 역사에서는 지속적인 민주주의 체제가 결코 없었다. 고대와 중세의 공화국들은 진정한 민주 국가들이 아니었다. 대중들―노예들과 (고대 그리스의) 외국인 거주자들―은 결코 통치에 참여하지 않았다. 어쨌든, 이 공화국들도 역시 선동과 퇴락으로 끝났다. 만약 대심문관(Grand Inquisitor)의 통치가 불가피하다면, 그가 교양 없는 가학적인 모험가보다는 차라리 로마 가톨릭 교회의 추기경, 부르봉 군주, 혹은 영국 귀족이 되게 하라.

이런 추론의 주요 단점은 치명적인 오늘날의 정책들로의 진화에서 낮은 사회 계층들이 행한 역할을 그것이 크게 과장한다는 점이다. 과두제의 친구들이 인간쓰레기(riffraff)로서 서술하는 대중들이 상층 계급들, 즉 기업가들ㆍ자본가들 및 지식인들의 엘리트를 제압하고 그들에게 자기들 자신의 사고방식을 부과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은 역설적이다.

지난 수십 년간의 개탄할 사건들에 누가 책임이 있는가? 혹시 하층 계급들이, 프롤레타리아들이, 새로운 교리들을 서서히 발전시켰을까? 전혀 그렇지 않다. 어떤 프롤레타리아도 반자유주의 교의의 구성에 전혀 기여하지 않았다. 현대 사회주의의 계통수의 뿌리에서 우리는 왕국 프랑스의 가장 저명한 귀족 가문들 중 하나의 타락한 자손의 이름[생시몽(Saint-Simon)을 말함―옮긴이 주]을 만난다. 사회주의의 거의 모든 조상들은 중상(中上) 계급의 구성원들이었거나 지적 직업의 구성원들이었다. 한때 급진적인 좌익 사회주의자였고, 오늘날 마찬가지로 급진적인 친나치 사회주의자인, 벨기에인 앙리 드 망(Henri de Man)이, “만약 누구든 모든 사회적 이데올로기를 일정 계급에 소속시키는 오도하는 마르크스주의 표현을 받아들인다면, 누구든 교리로서의 사회주의가, 심지어 마르크스주의조차도, 부르주아가 기원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2고 단언한 것은 아주 옳았다. 개입주의도 민족주의도 “인간쓰레기(scum)”에서 생기지는 않았다. 그것들도 역시 부유한 사람들의 작품이었다.

평화로운 사회적 협동에 아주 치명적이게 되었고 지금도 우리의 문명의 기초들을 흔들고 있는 이러한 교리들의 압도적인 성공은 하층 계급 활동들의 결과가 아니다. 프롤레타리아들, 근로자들, 그리고 농부들은 확실히 책임이 있지 않다. 상층 계급들의 성원들이 이 파괴적인 사상의 입안자였다. 지식인들이 대중들을 이 이데올로기로 개종시켰다. 지식인들은 그것을 대중들로부터 얻지 않았다. 비록 현대 교리들의 우위가 지적인 퇴락의 증명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하위 계층들이 상위 계층들을 정복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지식인들과 부르주아들의 퇴락을 증명한다. 대중들은, 그들이 둔감하고 정신적으로 타성적이라는 바로 그 이유로 말미암아, 새로운 이데올로기들을 결코 창조한 적이 없다. 이것은 항상 엘리트들의 특권이었다.

진실은 우리가 전 사회의 퇴락에 직면하지 그것의 몇몇 부분들에 국한된 해악에 직면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자유주의자들이 민주 정부를 국내와 국제 관계 양쪽 다에서 영구적인 평화를 보호하는 유일한 수단으로서 추천할 때, 민주주의의 몇몇 비판자들이 믿듯이, 그들이 비천한 사람들, 버릇없이 자란 사람들, 어리석은 사람들, 그리고 국내 야만인들의 통치를 옹호하는 것이 아니다. 통치하기에 최적인 사람들이 자기들의 동료 시민들을 설득하여 그 동료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자기들에게 관직을 위임하게 하도록 자기들의 능력을 증명해야 한다고 그들은[자유주의자들은] 주장한다. 자질의 증명이 폭력 행위나 사기 행위로 관직을 장악하는 것이라는, 모든 혁명가들에 공통적인, 군사주의 교리를 그들은 고수하지 않는다. 설득의 재능을 가지고 있지 않은 어떤 통치자도 오래 관직에 머무를 수 없다. 설득의 재능은 필수 불가결한 통치 조건이다. 아무리 선한 정부건 상관없이, 어떤 정부든 지속적으로 공중의 동의 없이 지낼 수 있을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은 헛된 환상일 것이다. 만약 건전한 사회 원칙들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게 할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우리의 공동체가 낳지 못한다면, 통치 체제가 무엇이건 상관없이, 문명은 상실된다.

평화, 민주주의, 자유, 그리고 자본주의의 유지에 대한 위험들이 “대중의 반란(revolt of the masses)”의 결과라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것들은 최상의 사회에 의해 응석받이로 자란 학자들과 지식인들, 부유한 사람들의 아들들, 작가들과 예술가들의 업적이다. 세계의 모든 국가에서 왕조들과 귀족들은 자유에 적대하는 사회주의자들 및 개입주의자들과 함께 일했다. 사실상 모든 기독교 교회들과 교파들은 사회주의와 개입주의의 원칙들을 신봉했다. 거의 모든 나라에서 성직자들은 민족주의를 지지한다. 가톨릭교가 세계를 포괄한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심지어 로마 교회조차도 예외가 아니다. 아일랜드 사람들, 폴란드 사람들, 그리고 슬로바키아 사람들의 민족주의는 대부분 성직자들의 업적이다. 프랑스 민족주의는 교회에서 가장 효과적인 지지를 발견했다.

독재자들과 귀족들의 통치로의 복귀에 의해 이 해악을 치료하려고 하는 것은 허사일 것이다. 러시아에서 차르의 독재나 프랑스, 스페인, 그리고 나폴리에서 부르봉가(家)의 독재는 건전한 행정의 보장이 아니었다. 독일에서 호헨촐레른가(家)와 프러시아 융커가(家) 그리고 영국 통치 집단들은 그들이 나라를 운영하는 데 부적합함을 명백히 입증하였다.

만약 가치 없고 비천한 사람들이 많은 나라들의 정부를 통제한다면, 그 이유는 저명한 지식인들이 그들의 통치를 추천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자기들의 권력을 행사하는 원칙들은 상위 계급 공론가들에 의해 틀이 짜졌고 지식인들의 승인을 얻는다. 세계가 필요로 하는 것은 헌법적 개혁이 아니라 건전한 이데올로기이다. 통치자들이 자기들의 임무에 적당할 때 모든 헌법적 체제가 작동될 수 있다는 점이 명백하다. 문제는 관직에 적합한 사람들을 발견하는 것이다.

선험적 추론도 역사적 경험도, 통치 받는 사람들의 동의가 주요 통치 요건이라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기본적인 관념이 그릇되었다고 증명하지 못했다. 이 동의가 없을 때는 자비로운 왕들도 계몽된 귀족들도 이기적이지 않은 성직자들이나 철학자들도 성공할 수 없다. 지속적으로 좋은 통치를 확립하기를 원하는 누구든 자기 동료 시민들을 설득하려고 하고 그들에게 건전한 이데올로기들을 제공하는 것으로 시작해야 한다. 그가 설득 대신에 폭력, 강제, 그리고 강압에 호소할 때 그는 그저 자기 자신의 무능력을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장기적으로는 강압과 위협은 다수파에게 성공적으로 적용될 수 없다. 대중들이 해로운 정책들을 지지할 때 문명에 대한 희망은 남아 있지 않다. 엘리트는 설득 덕분에 최고여야지, 총살형 집행 부대의 도움에 의해 최고여서는 안 된다.

이 논문은 ≪전능한 정부(Omnipotent Government)≫, 제2부, 제5장, 제3절, “귀족 정치의 교리(Aristocratic Doctrine)”(1944)에서 발췌한 것이다.


글쓴이) Ludwig von Mises

루트비히 폰 미제스에 관해서는 https://mises.org/profile/ludwig-von-mises를 참조하라.


옮긴이) 황수연(전 경성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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